일본 영화 이야기; 

전국시대 영화(3) 전국시대에 펼쳐지는 리어왕 '란(亂)'



일본에서 재탄생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리어왕'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리어왕, 오셸로, 멕베스,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많은 나라에서 다양하게 재창작 되어 왔습니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을 일본 전국시대에서 재해석하여 새로이 창작하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1957년에는 멕베스를 전국시대에 담아낸 '거미의 성'을 촬영했고, 1985년에는 리어왕을 전국시대의 이야기로 풀어낸 '리어왕'을 낳았습니다.





 타협이 없기로 유명한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 영화를 스스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하는 대작입니다. 무려 4억엔(22억)원을 들여 세운 성을 주저없이 태워버려 이것을 본 기자가 '아깝다'고 하자 '태우려고 만들었다'라고 하기도 했을 만큼 완벽주의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리어왕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살려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인간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아들들에게 나라를 물려주다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고 나는 편안히 쉬고 싶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치몬지 히데토라는 주변을 활발하게 정복해 이름을 드높인 영주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도 이제 칠십대 그는 자신의 세 아들 타로, 지로, 사부로에게 가독을 상속하고 은거를 하려 합니다. 세 아들을 한데 모은 그는 '

세 자루의 화살'이야기를 하며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합니다.[각주:1] 그러나 셋째 아들 사부로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가장 친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전국시대에 아들들의 정에 기대어 살아가려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간언합니다. 이에 분노한 히데토라는 사부로와 그에게 동조한 충신 탄고를 내쫓아 버립니다.


 일본에서 '타로(太郎)'는 장남에게 붙이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지로(次郎)와 사부로(三郎)는 각각 둘째, 셋째에게 붙이는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들은 아명으로 쓰다가 가독을 상속하거나 공을 세운 뒤에 다른 이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다. 하지만 이 삼형제는 끝까지 아명으로만 나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특정한 캐릭터성은 드러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단면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또한 자식들은 각각 노랑, 빨강, 파랑의 옷을 입고 있는데요. 첫째가 입은 노란색은 가롯 유다의 색으로 악당, 배신자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둘째가 입은 빨강색은 공포와 무절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막내가 입은 파란색은 순수함, 지성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각 캐릭터의 성격이 옷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히데토라에게 드리우는 그림자




"이치몬지가의 주인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가독을 상속하고 혼마루(본성)으로 이동해 기뻐하는 타로에게 아내 카에데는 찬물을 끼얹습니다. 아직 아버지 이치몬지 하루토라에게 있는 우마지루시[각주:2]를 빼앗아 오라 한 것입니다. 이를 빼앗아 오려 하던 타로의 부하들을 하루토라가 죽인 것을 계기로 하루토라와 타로의 사이는 완전히 갈라지게 됩니다. 끝끝내 서약문에 피로 지장을 찍어 줄 것을 요구하는 아들 타로와 그의 아내 카에데에 분노한 하루토라는 타로를 떠나 지로에게 향합니다. 사실 타로의 아내 카에데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하루토라의 손에 잃었었습니다. 그녀는 가슴에 품고 있던 복수심을 맹렬히 불태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님은 은거의 몸, 자식에게 기댄다면 몸 하나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실권을 빼앗긴 아버지 하루토라를 둘째 지로 역시 곱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부하들을 빼고 아버지 혼자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하며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비춥니다. 이제 진노한 하루토라는 둘째 아들에게서도 떠나 방황길을 걷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셋째 아들이지만, 자신이 내쫓은 아들에게 의탁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타로의 명으로 인해 백성들은 하루토라를 도울 수 없게 되어 하루토라는 양퇴진곡의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때 셋째와 함께 쫓겨났던 탄고가 돌아와 사부로에 의탁하도록 간언하지만, 두 간신의 모함에 빠져 셋째가 버리고 간 성으로 들어갑니다. 



미치고, 또 미치다



"예전에는 내가 미쳐 너를 웃겼건만, 이제는 네가 미쳐 나를 웃기는 구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로와 지로는 연합해 이치몬지 하루토라를 공격해 옵니다. 타로와 지로의 연합군의 공격에 자신의 부하가 하나하나 죽어가고, 자신의 식솔들이 자결한 데다가 간신들이 도망친 것을 알게된 하루토라는 할복을 시도하다 미쳐버립니다. 한편, 전투의 와중에 둘째 지로의 가신은 타로를 죽여버려 이치몬지 가문의 권력은 지로에게 집중되게 됩니다. 미쳐버린 하루토라를 보좌하는 것은 단 두명 충신인 탄고와 광대 뿐입니다. 미쳐버린 하루토라의 여정은 자신이 범한 죄들을 확인하는 여정입니다. 자신이 멸해 버린 가문의 아들, 자신이 불지르고 파괴해 버린 성터 등을 유랑하며 그는 점점더 미쳐갑니다.



"그런 건 싫어! 스에의 목을 가져다 주세요."


 한편 타로의 죽음을 알게 된 그의 부인 카에데는 역시 미칩니다. 자신이 갈 곳을 잃을까 단도를 꺼내 타로를 위협하던 그녀는 목을 긋기까지한 다음에 미친듯이 달려들어 지로와 통정하게 됩니다. 그 뒤에 그녀는 어처구니 없은 요구를 합니다. 자신을 정실로 들이고, 원래 정실이었던 스에의 목을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궤뚫어 본 지로의 충신 쿠로가네는 카에데를 경계하라고 거듭해 주장하지만 카에데는 오히려 쿠로가네가 나쁘다며 사이를 이간질 합니다. 이러는 와중, 힘을 기른 셋째 사부로는 아버지를 찾아 군사를 이끌고 지로에게 쳐들어 옵니다. 


 탄고와 광대는 까사스로 홀로 떠돌며 자신이 죽었다고 믿던 미쳐버린 하루토라를 찾아 내 사부로와 재회하게 합니다.  미안함에 아들을 피하다 이제와 재회하게 되자 하루토라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과 손을 맞잡습니다. 아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 하는 하루토나는 어느새 정신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갈등은 해소되고 해피엔딩을 앞두고 있는 듯 했습니다.



신과 부처를 욕하지 마라



"신과 부처는 없나! 있다면 들어라, 네놈들은 제멋대로인 장난꾸러기다. 심심풀이에 벌레처럼 사람들을 죽이고 즐거워하고 있어!"


"말하지마! 신과 부처에게 욕을 퍼붓지 마라! 신과 부처는 울고있는 것이다! 어느 세상이나 반복되는 악행 서로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신과 부처도 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세상이다! 편안함보다 괴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의 재회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지로가 파견한 저격병의 총알이 사부로의 가슴을 관통해 버린 것입니다. 염원하던 아버지와의 재회를 완수하지 못한 채, 사부로는 싸늘한 시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동안 몰랐던 아들의 진심을 겨우 알게된 아버지 하루토라는 분에 겨워하다 역시 사망합니다. 이 모습에 충신 탄고와 광대는 탄식합니다. 광대는 신과 부처를 탓하며 인간에게 어떻게 이런 비극을 내릴 수 있나며 원망합니다. 하지만, 탄고는 신과 부처를 욕하지 말라 합니다. 인간사의 비극은 모두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 인간은 스스로 비극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둘의 시각차이는 재미있게도 '비극'에 대한 과거와 근대의 시각과 비슷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성실하고, 올바르게 산다 하더라도 신이 비극을 내려 버리면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의 비극은 다릅니다. 근대의 비극은 사람이 직접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격이나 상황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광대와 탄고의 비극에 대한 시각은 이 두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한편, 지로를 수호하던 쿠로가네는 카에데의 밀명을 들은 병사들이 기어이 스에의 목을 잘라 온 것을 발견하고 카에데에게 따지러 달려듭니다. 카에데는 여기서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칩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복수에 대한 일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인해 이룩한 이치몬지가의 멸망을 사랑스레 바라보는 그녀의 악독한 모습에 참지못한 쿠로가네는 그녀를 베어버립니다. 이렇게 이치몬지 가문의 비극은 막을 내렸습니다.



쿠로사와 감독의 마지막 대작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 작품을 '일생의 사업'이자 '인류에게 보내는 유언'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과 비극에 대한 고찰을 담은 이 '란'은 일본의 색채를 입혀 더욱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벌어지는 리어왕을 보며 삶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줍니다.

  1. 실제로 전국시대에 츄고쿠 지방 센고쿠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가 세 자식들에게 한 말입니다. [본문으로]
  2. 일본에서 다이묘들이 자신을 상징하기 위해 깃발위에 덧댄 장식 [본문으로]
Posted by 시간의잡동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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