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 이야기;
전국시대 영화(1) 일본의 '광해' 카케무샤(영무자)
일본의 '광해'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
2012년 대한민국을 휩쓴 영화 중 하나는 바로 '광해'였습니다. 광해군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대역과 바뀌었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였지요. 이렇게 옛날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굴 뿐만 아니라 성격도 비슷하게 연기시킨 카게무샤(그림자 무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에도 수많은 카게무샤들이 있었습니다. 가이의 범이라며 많은 이들의 공포를 샀던 다케다 신겐 역시 많은 카게무샤들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 '카게무샤'는 다케다 신겐의 카게무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영화를 찍은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입니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더불어 일본이 배출한 3대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그는 그 실력으로 '영화계의 덴노(천황)'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명작을 배출하던 그도 1970년 일본 영화의 암흑기에는 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펜인 조지 루카스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원으로 제작된 것이 이 '카게무샤'입니다. 무려 600만불이라는 당대 최고의 금액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초기 컬러영화의 맛을 살린 훌륭한 영상미, 치밀하게 살린 역사고증, 그리고 일본인 특유의 파괴의 미학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카게무샤'의 역사적 배경
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다케다 신겐이 상경 중 그를 막아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패 시킨 '미카타가하라 전투' 그 중에서도 신겐이 총격당한 것으로 알려진 '노다성 공방전'부터 신겐의 아들 다케다 가츠요리가 가독을 상속한 뒤 오다 노부나가와 맞서 싸워 패배한 '나가시노 전투'입니다. 배경 역사를 알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제 다른 블로그인 역사이야기의 포스팅들을 링크해 놓겠습니다.
평범한 도둑이 카게무샤가 되다
"나는 좀도둑이란 말이오. 하지만 수백명을 죽이고 나라를 강탈한 당신이 나를...!"
영화는 세 명의 다케다 신겐이 만나며 시작합니다. 왼쪽은 신겐의 동생이자 카게무샤 다케다 노부카도, 가운데에 다케다 신겐 자신, 그리고 맨 오른쪽에 이 영화의 주인공인 새 카게무샤 후보 좀도둑이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다케다 신겐만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의 그림자는 가려서 보이질 않습니다. 이후 좀도둑이 카게무샤가 되어 신겐의 대역할 때에도 저 다이묘석에 앉을 때를 살펴보면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카게무샤'의 존재 자체가 '그림자'이기 때문에 따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신겐이지만 그가 '너도 도둑이 아니냐!'라며 일갈하자 그의 담대함을 마음에 들어 해 카게무샤로 키우기로 합니다. 좀도둑이 카게무샤가 되가는 중에 신겐은 상경을 시작합니다.
"적어도 3년 동안은 나의 죽음을 비밀로 하라. 움직이지 마라!"
파죽지세로 상경을 시작하던 다케다 신겐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대를 크게 격파합니다. 하지만 노다성을 공격하던 중 밤마다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으려 하던 신겐은 도쿠가와의 저격병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맙니다. 1 죽음을 예감한 그는 가신들에게 자신이 만약 죽더라도 3년간은 죽음을 숨기고 군을 움직이지 말라 명령합니다. 이로 인해 다케다군은 퇴각하는데 이 퇴각씬의 영상미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붉고, 푸르고, 파아란 형형색색의 '풍림화산'의 다케다군은 초기 컬러영화의 영상미를 훌륭히 살리고 있습니다. 또, 신겐의 사망씬에서의 음향은 마치 일본의 전통극 '가부키'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카게무샤, 자신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다
"카게무샤는 결코 자기 자신으로 일어날 수 없지."
신겐의 죽음을 알고 계속해서 카게무샤를 하기 힘들다며 좀도둑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다케다 가문에 큰 피해가 갈 것을 알게된 좀도둑은 카게무샤역을 수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난관을 겪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손자, 첩들을 기지로 속여나갔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케다 신겐의 아들 스와 가츠요리(다케다 가츠요리)가 마음대로 다카텐진성을 공략해 버리자 그의 내적 갈등은 극에 달합니다. 그의 내적 갈등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강렬한 원색이 대비를 이루는 공간에서 '진짜' 다케다 신겐이 추적하는 것으로 그려 냈습니다. 이 때 갈등이 극에 달할 때 카게무샤의 발이 물을 휘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극 중 술독 안에서 수장 됩니다. 즉 물은'진짜' 다케다 신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카게무샤는 물 위에서 휘적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책형을 받는다 생각하고 움직이지 마시오!"
이런 갈등을 겪던 그는 결국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다케다 가츠요리가 제멋대로 출진한 타카텐진성 공방전에서 신겐을 연기하게 됩니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거짓된 주군인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무장들을 보며 그는 '다케다 신겐'으로서 각성하게 됩니다. 적장이 눈앞에 까지 다가와도 산(山)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신겐의 겉모습 만을 흉내낸 것과는 다르게, 마음까지 닮은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도 동물의 직감만을 속일 수 없어 신겐의 애마를 타려다 쓰러지고 우에스기 겐신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상처가 없는 것이 들켜 쫓겨나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만천하에 신겐의 죽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멸망의 미학, 나가시노 전투
정식으로 가독을 상속한 다케다 가츠요리는 출병해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다케다 가츠요리는 신겐의 유언을 생각하며 간언하는 가신들의 말을 무시한 채로 출병하고, 카게무샤는 그런 다케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미 표리가 완전하게 다케다 신겐의 카게무샤가 된 그의 심리는 다케다군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데 이는 곧바로 그의 얼굴의 분장으로 드러나 전달됩니다. 그리고 시작된 나가시노 전투는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보통 알려진 오다 노부나가의 삼단격발에 다케다의 기마대가 무모하게 돌격해 전멸하는 모습을 재현해 냈습니다. 실제 전투같지 않게 형형색색의 '풍림화산' 부대가 차례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에 돌격해 쓰러져 가는 모습을 천천히 그리고 길게 쓰러져 가는 다케다군의 모습은 일본 특유의 멸망에 대한 미학이 담겨져 있습니다. 도망쳐 버린 다케다 가츠요리와는 다르게 창 한자루를 들고 적진에 돌격해 가는 카게무샤의 모습을 보면 누가 더 다케다의 주군에 가까운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총에 맞아 비틀대던 그는 강으로 빠집니다. 자신의 죽음을 물 속에서 맞게 됩니다. '진짜' 다케다 신겐이 수장당했듯이 그도 물 속에서 자신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그림자' 무사일 뿐입니다. 그가 죽으면서까지 애타게 잡으려 했던 '풍림화산'의 깃발은 끝까지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케다 신겐이되 다케다 신겐이 아니었던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 최후인 것입니다.
쿠로사와 아키라의 대작
무려 3시간이나 되는 러닝타임인데다 요즘 블록버스터 같은 극적인 요소는 전혀 없지만 '카게무샤'는 전혀 지겹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작은 곳에도 녹아 들어있는 감독의 의도를 읽다보면 어느새 영화의 막이 내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 영화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큰 스케일 또한 눈을 즐겁게 해주는 장치 중 하나입니다. 전국시대에 관심이 있거나 일본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 보시는 게 어떨까요?
- 이는 창작으로 실제로는 병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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